19金 Talk’는 편집장이든 구독자이든 누구든지 자유로운 주제를 통해 갑갑하거나 닫힌 마음, 즐겁거나 슬픈 나만의 이야기를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열어보자는 뜻으로 마련한 장소입니다. 해브투 뉴스는 단순히 취재와 보도 끝나지 않고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공유하며,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열린 소통의 모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다리겠습니다. (편집자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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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 앞 전경 출처=해브투뉴스 |
“나는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데...”
지난달 말, 생각지 못했던 황금연휴가 생겼다. 직장인에게는 둘도 없는 ‘대체공휴일’!.
‘애들을 데리고 어디라도 다녀올까, 집사람과 여행을 다녀올까’ 고민 중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들아, 월요일(대체공휴일)도 쉰다고 하는데 엄마랑 합천 산소에 다녀오면 안 될까” 솔직히 필자는 망설임도 없이 “네”하고 대답했다.
창피한 얘기지만, 반 백 살이 되도록 어머니의 ‘엄마·아빠’ 나에게 ‘외할머니·외할아버지’ 산소를 다녀온 적이 없다. 심지어 어머니가 자란 고향 위치도 몰랐다. 이모가 살고 계신 그곳이 단지 내 엄마의 고향으로만 알고 지냈다.
그마저도 어릴 적, 두어 번 이모댁에 다녀온 것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도 컸고, 친가 산소는 몇 해 전 다녀오기도 해서 이번엔 선뜻 나서게 된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이모댁을 ‘로드뷰’를 통해 찾았다. 이종사촌 형님과 누님에게 주소를 여쭤봤지만 내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고 싶기도 해서였다.
‘로드뷰’를 통해 본 이모댁 주변은 정말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내 기억속의 이모댁은 온데간데없고 새로 지은 양옥집이 들어섰으며, 민둥산이었던 뒷동산은 어느새 숲이 우거져 있었다. 마을은 텅텅 비어 인기척은 찾기도 어려웠고, 딱 하나 마을을 지키고 있는 우물만이 뚜껑을 덮은 채 필자를 반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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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동산에서 바라 본 웅기마을 출처=해브투뉴스 |
이 나이에도 어릴 적 이모댁 주변 환경이 생각나는데, 우리 어머니는 부모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참 그러고 보니 필자는 한부모가족의 구성원이다. 어머니는 아주 어릴 적 외할아버지를 잃고 이후 외할머니도 돌아가신 사별 한부모가족의 경우다. 어머니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신 바람에, 지금은 돌아가신 외숙모가 외삼촌과 함께 엄마·아빠 역할을 해주시면서 어머니를 키웠다.
아버지의 경우는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공부하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행방불명으로 할머니와 함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상황으로,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얼굴은 아예 모른다. 물론 시대상황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라 지금 시대와는 와 닿지 않겠지만, 필자가 어릴적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가 계신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어찌됐든 어머니는 두 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시다. 외숙모는 이런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부모 없는 아이 소리 듣지 않게 강하게 키우셨다고 한다. 그런 엄마가 연세가 들면서 부쩍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찾으셨다. 그나마 이번엔 산소를 이장한 덕에 외삼촌과 이모를 함께 모시고 방문할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제일 연장자인 이모, 그리고 외삼촌, 다음이 내 어머니다. 두 분이야 산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그나마 종종 산소를 찾아 왔지만, 어머니는 서울로 상경한지 벌써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바쁘단 핑계로, 서울에서 멀다는 이유로 다양한 이유로 산소에 들르지 못해 이내 죄송한 마음만 들었나 보다.
산소는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이장한 곳으로 길을 내기가 어려워 산소까지 올라가는데 애를 먹었지만, 시간만 내면 나 역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얼마나 다행인지.
태어나 처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그 뭐랄까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고 해야하나. 나도 모르게 죄송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가고 있을 때 어머니는 울먹이셨다.
“나는 한 번도 엄마 소리 못해 봤는데...” 그 혼잣말을 듣고 내 가슴은 미어지고 찢어졌다.
나는 무슨 일만 있으면 “엄마, 이거해줘, 저거해줘”, 짜증부리고 화내고 했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너무나도 어머니에게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 내가 정말 무지했구나 싶었다.
정작 나는 어머니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아들로써, 자식으로써 받고 싶은 것만 요구했다. 그럴 때 마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나에게, 동생에게 모든 걸 다 내주셨다. 정작 어머니는 그런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 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배부르게 모든 걸 다 받고 평생을 살아 온 것이다.
나도 이젠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최대한 부모님을 챙기려고 애쓴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어서다. 두 분이 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이뤄드리려 한다. 단지 자주 찾아뵙고 함께 식사하고 손주들 얼굴보고 대화를 나누고, 가까운 곳에 바람을 쐐는 정도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억에 추억에 남기고 싶은 내 마음인 것이다.
이번에 산소를 다녀와서 걱정이 하나 생겼다.
“나는 엄마를 옆에 두고 싶은데, 우리 엄마는 어디를 더 원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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